다소 오랜만에 뻔뻔하게 돌아왔지만 일단 슬램덩크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아니, 스포츠를요.
스포츠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저는 스포츠맨이니까요.
슬램덩크 해석이니 인물 서사니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여러분이 더 전문가이실 겁니다. 저는 그보다는 저에 대한 얘기만 할 겁니다.
제가 왜 운동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요. 아주 유치해져야 합니다. 아주아주.
1. 내 인생 첫 번째 축구 경기
_고등학교 1학년. 공학. 여자와 남자가 나뉘어 축구 연습을 했습니다. 5시간에 걸친 축구 수업의 끝은 수행평가. 평가는 경기를 직접 치르는 것으로 이뤄졌습니다. 드리블도, 슛도 아니라 경기라니요. 여학생들이라고 해서 모두 운동을 못하는 게 아닙니다.(당연한 소리죠?) 공을 발에 붙이고 누비는 친구들 사이에서 골키퍼로 배정된 저는 외롭게 골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운동을 익숙해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골은 하나, 둘, 셋... 정말 많이도 들어갔습니다. 같은 팀인 친구들은 슬슬 원망의 눈빛을 보내고, 저는 꽤 긴 시간의 경기를 홀로 서 있어야 했습니다. 얼굴 바로 밑의 피부다 뜨거워지고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발 밑의 축구장이 길게 늘어져 만 평은 되어 보였어요. 오롯이 혼자라는 기분. 시간이 흐르지 않는 느낌. 우주에 동떨어진 기분. 그때 그런 걸 느꼈습니다.
__(이제부터 정말 유치해집니다) 경기가 끝나고. 체육 선생님은 아이들을 번호순으로 줄세워놓고 수행평가 점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말했죠. "A+" 아이들이 술렁거렸습니다. 제 맘도 술렁거렸습니다. '선생님이 나를 다른 애랑 착각한 모양이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뒤, 저는 혼자 남아 선생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다른 친구랑 절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점수가 잘못된 거 같아요. 저는 골키퍼로 뛰었던 00번 000이고요, 쓸데없이 뛰어다니기만 하고 5골 넘게 먹혔어요." 그때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바로 그거야. 넌 끝까지 뛰었으니까."
__ 시험 점수에서 교훈을 얻다니 너무 유치한 한국 학생 같지만. 그 기억은 저에게 아주 오래, 아니 사실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종종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저는 그 말을 떠올립니다. "바로 그거야. 넌 끝까지 뛰었잖아." 끝까지 뜀으로써 도리어 끝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저는 그날의 축구 경기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축구 선수를 비롯한 운동선수들의 인터뷰를 찾아 읽고, 룰도 뭣도 모르면서 무작정 운동 경기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스포츠가 좋아졌습니다. 스포츠에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유치한 수업들과 유치한 시험문제들, 그걸 따르며 수행평가 하나 안 풀릴 때 심장이 철렁거리는 더 유치한 저 스스로에게는 없는 가르침이.
2. 끝까지 뛰는 마음. 그것 때문에 4회차.
__ 저는 슬램덩크 애니메이션도 만화책도 본 적 없었습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냥 제가 일본만화를 좋아해서 보러 갔죠. 그리고 4회차를 했습니다.
__ 송태섭은 존재도 몰랐습니다. 제가 존재를 안 건 잘생긴 서태웅 뿐이었거든요. 그런 송태섭이 주인공입니다. 송태섭은 키가 작습니다. 방황도 했죠. 부채감을 주는 형과 달리 어려서 '천재다' 같은 평가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정대만, 서태웅처럼 어릴 적부터 재능 있었던 사람들이 허다한 농구 판에서. 슬램덩크의 세계관 안에서 송태섭은 어쩌면 저와 같은, 5골을 먹히고 있는 골키퍼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송태섭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기권하지 않습니다. 토나올 것 같이 긴장돼도. 도망치는 방법은 많잖아요? 아픈 척 할 수도 있고, 권준호 선배에게 바꿔달라고 할 수도 있죠. 선수가 적어도 도망치는 법은 많은데 송태섭은 그 자리에 그저 있을 뿐입니다. 끝까지 뜁니다. 송태섭이 말합니다. 평온해 보이고 강해 보이는 선수들 사이에서, 너무나 겁먹은 자신이지만, 다독입니다. "심장이 쿵쾅거려도, 이를 악물고 잘난 척을 한다."
__ 모두가 그렇겠지요. 태평해보여도 겁이 나고 흔들릴 겁니다. 이를 악물고 잘난 척을 해보는 겁니다. "한 골만 더!"를 외치며.
3. 5회차에서 만난 뜻밖의 모습.
__ 5회차는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제법 의무적으로 보러 갔습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첫 회차 때만큼의 감동이나 벅참을 느끼긴 어려웠어요. 근데요, 그 순간이 되니, 주인공들뿐 아니라 모두가 보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두가 농구를 즐기고 있구나. 내가 누군가들의 전성기를 보고 있구나.
이들이 무언가를 좋아하던 때, 우리 언젠가 그걸 정말 좋아했다고 노래할 수 있는
그 순간을 내가 지금 목격하고 있구나."
__ 치열한 경기, 끈기, 독기 뭐 그런 게 아니라 '즐거움'이 보이기 시작한 그날의 관람은 정말 묘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가장 감정이 낮게 시작했던 그날 저는 가장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죠.
나도 언젠가는 인생의 어느 시점을 이렇게 기억하겠구나.
나 그때 정말 열심히 뛰었다고,
내 삶을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정말 사랑했다고.
그리고 그걸 보고 있는 누군가도 있겠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오랜만에 수업이 아닌 가르침을 받은 느낌이었거든요.
4. 올해도 씁니까?
__ 레터는 계속 씁니다. 뻔뻔하게 오랫동안 쉬었지만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을, 제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잘, 많이 쓰고 읽히는 레터가 아닐지라도 해보려고요. 모호하고 흔들려도 할 겁니다. "다만 끝까지 뛰었다."고 말할 수 있게.
__ 레터는 한 달에 한 번으로 바꿀 예정입니다. 애매한 매달 말, 화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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